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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전시후기

나점수 개인전: 무명(無名) 정신의 위치 (아트스페이스3)

by 통통돈까스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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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점수 개인전: 무명(無名) 정신의 위치

2022.06.10 ~ 2022.07.16

아트스페이스3

무료 전시

아트스페이스3 ART SPACE 3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7길 23

화요일 ~ 토요일 10:30 ~ 18:00 (일요일, 월요일 휴관)

< 전시 소개 >

조각의 모국어는 무엇인가? 나무를 어떻게 깎아야 목조각이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되는가? 어떻게 해야 이미 멸종했거나 멸종할 언어로 조각하기를 면하고, 모국어를 잃어버린 조각가 신세를 면하는 것인가?
우선은 나무를 사용하거나 다루는 우월한 주체를 자각하고, 마음에서 올라오는 깊은 연대감으로 그것을 신화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지각으로 지각하는 것으로부터다. 그러한 고유하게 조각적인 지각을 나점수 작가는 ‘살핌’이라는 개념으로 함축한다. 조각의 모국어는 살핌으로써의 지각 안에서 발휘되고, 그것을 통해서 “붙들 수 없는 근원”에까지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공간과 물성만을 고집하는 조각은 근원이 마른 샘과도 같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오독만 있을 뿐 근원으로 향하는 길은 부재하는, 모국어를 상실한 조각이다. 그런 조각은 헛것이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가 침묵하는 것은, 명상의 시늉을 하지만 실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 나무를 깎는 행위는 나무를 소모하는 별스럽고 현대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조각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거나 최소한 비옥함과는 거리가 먼 나무 깎기일 뿐이다.
나점수는 조각적 지각인 살핌으로서의 지각, 곧 붙잡을 수 없는 근원을 붙잡으려는 애씀으로 나무 앞에 선다. 그렇게 마주할 때 비로소 나무를 보는 ‘응시의 감각’이 생성된다. 이 응시의 감각으로부터 나누고 고립시키고 지배하는(divide, isolate and dominate) 인식의 대안으로써 통합하고 대면하고 공생하는(Integrate, meet, coexist), 진정으로 조각적 인식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조각의 시침을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조금씩 축적되고,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비산 되었던 조각적 사유의 파편들이 다시 한 자리로 모인다.
하지만 이런 개념적인 설명만으로는 나점수의 조각이 나무와 통합되고, 대면하고, 공생하는 관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개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친구 개념들을 더 많이 데려와 길게 늘어놓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는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에 의하면, 깊은 연대에 기반하는 관계의 저변에는 “서로 함께 공동으로 슬퍼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관계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배경에 무명(無名)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시간에는 누구도 이름을 붙일 수 없기에 무명의 죽음이다. 나점수 작가는 말한다. 어떤 궁극의 순간을 향해 매 순간 변하는 세계 자체의 슬픔이요, 그것에 조응하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행위”로서 인식의 슬픔이기도 하다고, 기록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슬픔이라고, 나무를 깎을 때 그 무상한 노동의 단위들에서 불가피하게 대면하게 되는 슬픔이라고 말이다.

출처 : 아트스페이스3

 

아트스페이스3 ART SPACE 3

https://artspace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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